동대문 DDP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 미술 전시에 다녀오다
3월 주말에 다녀온 데이비드 호크니와 브리티시 팝아트 (David Hockney & British Pop Art) 미술 전시. 미술 전시보다는 박물관에서 그림을 전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던 전시였다. 작품도 많고, 사람도 많고... 팝아트라서 그랬는지 팝아트가 흥했던 당시의 노래를 틀어놓았는데, 그 노래가 참 정신이 없어서 그림에 집중하기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도 호크니 작품이 많아서 호크니 그림은 열심히 보고 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는 오전 일찍 가면 기다리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호크니가 하드 캐리한 전시
전시 제목을 잘 지었다고 말하기엔 좀 고민이 된다. 데이비드 호크니와 브리티쉬 팝 아트라는 이름에 맞게 호크니와 브리티쉬 팝 아티스트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호크니가 메인 디쉬면 브리티쉬 팝 아트는 애피타이저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메인과 애피타이저가 따로 노는 느낌이어서, 그럴거면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만 모아서 호크니 전시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엔 호크니의 대표작들이 온 건 아니어서 개인전으로 하기엔 약한 느낌이 있지만.
어쨌든 호크니 작품을 보러 간 입장에서는 호크니 그림이 많아서 좋았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호크니가 하드 캐리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화집에서 보지 못했던 호크니의 작품들
호크니의 일러스트레이션, 에칭, 리소그래프 작품들이 꽤 있었다. 호크니 화집에서 본 적 없는 작품들이 꽤 있어서, 호크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에드워드 호퍼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보면서 아, 호크니도 외주를 하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퍼와 달리 호크니는 외주도 재미있어하면서 그렸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호크니의 경쾌한 색감이 들어간 작품. 호크니의 소파 그림들을 좋아한다.
호크니도 꽂히는 대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리면서 연작을 만드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참 유명한데, 그 그림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호크니의 그림들은 관찰한 것들을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서 보여주어서 기발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기발하고 재미있는데, 예쁘면서도 질리지 않고 오래 볼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나다.
물을 리얼하게 잘 그리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호크니처럼 그린 사람은 없으니까. 호크니, 하면 생각나는 물의 이미지가 확 떠오르니 말이다. 그런 면을 배우고 닮아서 내 것으로 흡수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 창작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겠다.
호크니의 말을 벽에 옮겨놓은 것도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아크릴 물감을 엷게 희석한 것에 세제를 섞어 캔버스에 바르면 캔버스가 물감을 흡수하면서 물이 움직이는 느낌, 젖은 느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런 걸 알려줘도 똑같이 구현하지는 못하니까,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것이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가르쳐줬는데, 그대로 못하면 가르쳐준 그 사람이 얼마나 연구하고 노력했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 사람을 더 존경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경험이 더 많았다.
호크니의 물을 주제로 한 큰 공간도 있었다. 풀장 바닥을 걷는 기분이었다.
호크니의 사진 콜라주, 알파벳, 미술 전시 포스터와 극장 포스터 등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참 가리는 거 없이, 재미있게 다작한 그림 덕후인 것 같다. 그래서 더 친근한 느낌도 든다. '나는 화가다' 하는 식의 권위 의식 같은 게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지금까지 오래오래 살면서 아이패드로도 그림 그리고 하는 거겠지?
브리티쉬 팝 아트 작품들도 볼만은 하다
브리티쉬 팝 아트의 역사를 훑는다는 측면에서는, 호크니 외 타 아티스트 작품들도 볼만은 하다. 다만 호크니와 같이 놓여있으니 많이 대조가 되면서 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 번 보면 질려버려서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야 하는 작품들도 많으니까. 호크니와 비교해 그들이 못하다던지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솔직한 감상이 그렇다. 왜 호크니를 거장이라고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영국 가수들 음반 앨범 표지 작업 모음도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다양한 작가들이 작업한 앨범 표지 가운데 설명을 보지 않아도 어느 게 호크니 작품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볍게 볼만 하지만 제 돈 주고 보기엔 아까운 전시
가족, 친구들과 나들이 나와서 가볍게 전시 보면서 수다도 떨고 밥도 맛있는 거 먹고 하고 싶은 날엔 괜찮은 전시다. 그렇지만, 이걸 제 돈 주고 보기엔 아깝게 느껴졌다. 그런 면에선 조금 아쉬움이 남는 전시였다고 하겠다. 얼리 버드로 예매해서 가서 참 감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크니 작품을 보러 가는 거면, 그리고 할인 받아서 가는 거면 다녀오라고 하겠다. 그게 아니면 다른 전시 보러 가도 괜찮지 않겠냐고 슬쩍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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