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넘치는 한국 현대 미술 작품을 고루 볼 수 있는 전시
에드워드 호퍼 전시에 다녀오고 며칠 뒤, 압구정 K 현대 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미술 전시 <Geeky Land (괴짜전)> 에 다녀왔다. 회화, 일러스트, 설치, 그래피티 등 80여 명의 한국 현대 미술 작가들이 출품한 1050여 점의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여러 층에 걸쳐서 관람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다 (전시 기간: 2023년 4월 8일 - 2023년 10월 8일).
줄 서지 않아도 되는 전시
전시에 갔던 때는 5월 첫주였는데, 주말이었지만 비도 오고 오전이어서 그랬는지 꽤 한가한 편이었다.
단, 전시 입장시 소지품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미술관 입구에 비치된 유료 사물함을 이용했다. 큰 사물함을 쓰면 서너 명 되는 일행들의 가방도 한 번에 넣을 수 있으니 좋다. 1500원의 이용료를 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별로 없고 조용하니, 일행 여럿과 전시를 보는 입장에서는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어서 좋았다. 호퍼전을 보고 다녀온지 얼마 안 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재미
서울 시립 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전처럼 한 작가의 작품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전시도 재미있지만, 괴짜 전처럼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개성 넘치는 여러 작품들 중에 어떤 작품이 눈에 더 들어오는지도 볼 수 있고, 어떤 배경색에서 그림이 더 돋보이는지, 전시의 초반, 중반 후반 어느 쪽에 걸려 있으면 사람들 눈에 더 띄는지 등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런 전시에 오면 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림을 봤었다. 그림을 사랑하고, 또 창작을 하며 전시 경험이 있는 동기들과 그림을 보다 보니 이렇게 다양한 부분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여러 작품들 중에 흥미롭게 보았던 작가들의 작품을 아래와 같이 나눈다.
그래피티와 캐릭터 작품이 주를 이뤘던 홍태양 작가
그래피티에 영어가 아닌 외국어, 한자 등을 다양하게 섞어서 쓴 것이 재미있었다. 다만 어떤 의미로 글자들을 썼는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미술 전시에서 그림 자체가 주는 인상이나 느낌을 즐기는 것보다, 그림에 쓰인 문자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시간을 더 할애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할까?
또 다른 그래피티 작품에는 글씨가 덜 나오고, 그림이 더 많아서 상대적으로 보기가 더 편안하다고 느끼기는 했다.
유인원 (고릴라?)가 등장하는 작품들도 몇 개 있었던 것 같은데, 사진으로 찍어두진 않았다. 얼핏 니고 유지의 패션 브랜드 Bape가 생각나는 느낌이었다.
만화 캐릭터를 재해석한 이노지 (Enoji) 작가
눈을 뚫어놓은 모양이 재미있었다. 롯데월드에서 파는 헬륨 풍선이 구겨졌을 때의 모양 같기도 하고, 무섭다거나 이상하다기보단 폭신폭신할 것 같은 느낌이다.
심플하고 쉬운 그림, 이나피스퀘어 (Inapsquare)
알고 보니 두 명의 작가가 함께 작업한 것이었다. 박인아 작가의 'Ina', 최필선 작가의 'P', 그리고 둘이 함께 작업해 그 이상의 시너지를 낸다는 제곱 (square)의 의미를 같이 담고 있는 이름이다. 브랜드 이름 같기도 하고, 수학 기호 같기도 하다. 작품을 그리는 역할, 작업의 방향을 디렉팅 하는 역할을 각자 맡아서 한다고 하니 혼자서 작업할 때와는 또 다른 경험일 것 같았다. 문자가 여러 군데 들어가 있지만, 블랙 앤 화이트의 단순한 색 조합, 큼직한 이미지와 함께 눈에 쉽게 들어와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터프팅 기법으로 큰 작업을, 담다 (Damda) 작가
요즘 유행이라는 터프팅 기법을 이용해서 벽 위에 자연에서 받았던 따뜻함과 안식을 담아냈다고 한다. 스케일이 크고 입체적인 작품들이 꽤 있었는데,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아주 예뻤다. 아주 넓은 호텔 로비 같은 데 걸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약간은 무게가 있지만 다채로운 색감이 좋았다. 미술 작품의 크기가 클 때 받게 되는 시원하고 좋은 느낌이 이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졌다.
인스타그램에서 찾아보니 다양한 공간과 야외에서 협업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궁금하면 사진을 찾아봐도 좋겠다.
'진짜 같지 않은데 진짜,' 고전 명화들을 현대적으로 오마주한 오지영 작가
오지영 작가의 작품은 전시 끄트머리에 있었는데, 현대적인 느낌의 작품들이 많은 가운데 있으니 더 돋보였다. 오지영 작가의 인스타 계정에서 사진으로 그림을 볼 때와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호퍼전에서 봤던 작품들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신선함과 흥미를 느끼기도 했는데, 그건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작품에 반영하는 생각이나 감정이 내게 와닿으며 즉각적으로 형성되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지영 작가의 작품들은 물감 두께가 엄청 얇은데 깊이가 느껴졌다. 실제로 아주 얇게 여러 겹으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피부의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푸르스름한 빛깔이 느껴진다. 사진으로 볼 때는 다 느낄 수 없는 깊이다.
정물화도 예쁠 뿐만 아니라 재미있었는데, 그 이유는 현대인들이 사랑하는 음료 중 하나인 코카콜라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고전 미술에선 찾아볼 수 없는 가벼움(?)이다. 이런 부분이 있어서 고전적인 정물화이지만 미니멀한 현대 미술에 익숙해진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기에 무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색감이 쨍한 몇 작품은 얼핏 보면 디지털 작업한 작품 같이 보이기도 했는데 유화였다. 예수, 성모 마리아 등이 존재하는 공간의 배경이 초현실적으로 그려져서인지, 디지털 작업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드로잉을 유화로 오마주한 작품을 보면서는 복원 미술 같다고 느꼈다 (위 사진에서 왼쪽 두 점). 괴짜 전 인터뷰에 따르면 드로잉이었던 고전 작품들이 현대에 유화로 다시 태어나면 어떤 느낌일까를 상상하며 재해석했다고 한다. 그림과 어울리는 앤티크 액자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요즘엔 그런 액자들이 잘 나오지 않고, 구하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 전에서도 보았지만, 오죽하면 액자를 복원하는 전문가들이 따로 있을까.
오지영 작가 작품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위 사진에서 왼쪽 두번째 (검은색, 붉은색 배경) 토르소 작품과, 그 아래 푸른 천을 두른 석고상 (인물?)이다. 단순하지만 무게감 있는 색감과, 시간을 쌓아서 만들어낸 작품이 주는 감동이 느껴진다. 특히 두 번째 작품의 경우에는 시간이 지나면 물감이 떨어지도록 제작되었다고 한다. 몸통 부분을 자세히 보면 이미 떨어져 나간 부분도 조금 있다.
푸른 천을 두른 석고상을 볼 때는 시원한 블루에 눈이 시원해짐과 동시에,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고독함과 침묵의 고요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방탄소년단의 '피땀눈물'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이 생각나기도 했다 (나는 아미가 아니지만 아미인 분들이라면 단번에 어느 장면인지 알겠지?).
유화를 배우고 나서는 유화 작업하는 작가들의 재능과 노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갈수록 체감한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 현대적으로 고전주의 리얼리즘을 캔버스 위에 구현해 내는 작가의 상상력, 재능과 노력이 대단하고 멋지다. 거장들의 그림을 즐기고 공부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작품을 즐기고 배울 점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도 창작자로서는 꼭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하게 구경거리가 많아서 지인들과 식사 전에 가볍게 관람하기 좋은 전시였다. 궁금하다면 10월 전에 가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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