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술 전시

탄생과 삶, 소멸을 담은 미술 전시 <잡초> - 안톤 무나르, 페레스 프로젝트 서울

by 티카르트 2024. 10. 28.
반응형

 

탄생과 삶, 소멸을 담은 미술 전시, 안톤 무나르의 <잡초>

 

페레스 프로젝트에서 열리는 안톤 무나르의 서울 첫 개인전에 다녀왔다. 안톤 무나르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으로, 1997년생 청년 작가이다. 전시 제목으로는 스페인어 단어인 'Malas Hierbas'라는 제목이 쓰였다. 무슨 뜻인가 해서 리플릿을 확인하니 한국어로는 <잡초>라고 번역이 되어있었다. 어떤 작품을 보게 될지 확 와닿는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회화와 드로잉, 영상 작업을 모두 볼 수 있는 현대 미술 전시 

 

안톤 무나르에게는 두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는 캔버스, 종이, 나무 서랍에 그린 작품과 영상 작업물을 볼 수 있었다. 리플릿에 쓰인 작가의 말에 따르면, 드로잉과 영상 작업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전시라고 한다. 안톤 무나르에게 드로잉은 창작의 핵심이라고. 

 

창작에 쓰이는 모든 재료가 유한하지만, 나무 서랍에 그린 회화 작품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나무 서랍은 가구의 일부로 쓰다가 버리는 게 일반적이다. 생활하면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사물, 게다가 나무로 만들어져 시간이 지나면 썩을 것이 확실한 서랍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신선했다. 어렸을 때 크레파스나 색연필을 가지고 그림 그리다 책상이나 책상 서랍에까지 낙서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도 있었다. 아주 밝지는 않은 색이 주로 쓰여서 눈이 아프지 않은 것이 좋았다. 

회화 작품이지만, 페인팅이라기보다 드로잉의 느낌이 훨씬 강하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보면 단순해보이는 그림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웃라인 안팎으로 여러 가지 톤이 풍성하게 들어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아래 그림과 같은 그림을 보면, 무나르는 구성이나 디자인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듯하다. 

 

 

 

물감을 쓰지 않고 분필, 파스텔로만 그린 드로잉 작품.

선의 흐름과 그린 대상의 생명력, 그리고 그린 대상이 있는 공간이 함께 느껴져서 좋았다.  

 

 

 

아래 작품을 보면서는 피터 도이그의 작품이 생각나기도 했다. 오일 물감을 흐르게 하지 않고 뻑뻑하게 썼다는 것이 도이그와의 차이점이다. 

쓴 색의 느낌이나, 사람 얼굴을 정확히 묘사하지 않은 것, 선의 흐름 등을 보았을 때 도이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림 중에서도 손이 표현된 형태와 손에 쓰인 색이 아주 재미있었다.

손에만 붉은 색을 써서 손등에서 팔로 이어지는 부분만 확 강조된 느낌이 있다.

그림 앞을 떠나서도 흘러내리는 듯한 손이 기억에 남기도 한다. 

 

 

 

위 사진은 사람 오른쪽에 놓인 뻥 뚫린 부분이 재미있어서 찍게 되었다. 뻥 뚫린 부분은 색이 칠해진 부분이긴 하지만, 비교적 밝은 색이라서 그 부분만 뻥 뚫려 보여 그렇게 표현했다. 노랗고 흰 덩어리의 가장자리에 은은하게 보라색이 들어간 것이 그림을 살려준다고 생각했다.  

 

 

 

뻥 뚫린 덩어리들은 자세히 보면 물감을 많이 칠하지 않아 캔버스의 질감이 잘 보인다. 캔버스 전체를 물감으로 다 덮지 않고, 일부 얇은 부분이 있는 것은 그림을 답답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 같다. 

 

 

 

<잡초>라는 제목으로 묶인 안톤 무나르의 드로잉 작품들 

 

드로잉 작품이 특히 많았다. 드로잉 하는 것도 좋아하고 보는 것도 좋아해서, 더욱 흥미롭게 보았다. 

<잡초>라는 전시 주제에 걸맞게 마른 잡초가 드로잉 사이 사이에 붙여져 있었다. 

 

드로잉을 그냥 액자에 넣거나 흰 벽에 붙여서 보여줄 수도 있지만,

잡초와 드로잉이 하나의 작품으로 어우러지게 한 것이 또 하나의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잡초도 아무 것이나 놓지 않고, 뒤 배경 천 색과 비슷한 것, 그리고 드로잉의 선 흐름과 비슷한 형태의 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놓았다. 

전시된 무엇 하나도 허투루 낭비되지 않고 서로서로 어우러지게 배치한 것이 굉장히 감각적이라고 생각했다.

꼭 세련되게, 예쁘게 보이는 것만이 감각적인 것은 아니다. 기획 의도와 주제에 따라서 엉성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감각적으로 느껴지도록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무나르는 그림 그리는 행위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조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색을 많이 쓰지 않고, 묘사를 많이 하지 않고도 모든 것이 잘 보이는 재미있는 물감 드로잉이었다. 

 

 

 

아래 작품이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동양화와 서양화의 느낌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림은 그리기 쉬워보이지만 막상 그려보면 이렇게 풍경과 사람의 인상이 모두 드러나도록 그리기 참 어렵다. 

 

 

 

아래 드로잉은 그림책에 나올 법한 일러스트레이션 같아서 친숙한 느낌도 들었다. 

같이 놓인 잡초의 모양과 그림자도 예뻐서, 이 모두가 하나의 작품으로 보였다. 

 

 

 

 

이 작품들을 통해 매일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무언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결핍된 부분과 
그 결핍이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두 받아들[임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안톤 무나르 


* [] 안의 내용은 영문 리플릿을 보고 한국어 번역을 더 이해하기 쉽게 바꾼 것이다.

 

 

 

 

그림이 그려진 종이의 모서리를 모두 반듯하게 자르지 않은 것, 한쪽만 어두운 색 선으로 채색이 된 것이 재미있다. 

 

 

 

 

드로잉은 여러 면에서 제 창작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처음 종이를 만질 때 모두 하는 경험이니까요.

글을 읽고 쓰기 전, 어린 나이의 우리는 상징을 만들어냅니다.
나무 그림이 모든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처럼요.

안톤 무나르

 

 

아래 그림에서는 그림과 함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작가 서명을 드로잉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림의 일부로 보이게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창작자로서 참고할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래 사진들은 한두번씩 더 보게 되었던 드로잉 작품들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것이다. 

 

 

위 그림은 여백을 잘 활용한 것이 좋았다. 

 

 

이 그림은 멀리서 보면 바다가 보이는 절벽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면 절벽의 바위에 사람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여 재미있었다. 

 

 

티가 나지 않게 사람을 숨겨놓은 느낌은 아래 그림에서도 이어진다. 

 

 

 

왼쪽 여백에 사람 얼굴 표정 같은 것이 낙서처럼 그려져 있는 게 재미있었다. 

 

 

 

 

 

 

 

 

<잡초>라는 이름으로 묶인 드로잉 섹션을 모두 돌아보니, 왜 잡초를 전시 제목으로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톤 무나르가 이번 개인전에서 사람들에게 제일 보여주고 싶은 부분은 

어린아이가 그리는 것과 같은 순수함이 느껴지는 드로잉이 아니었을까. 

 

아래 그림은 드로잉 위에 걸려 있었던 회화 작품이다.

 

 

 

손잡이가 달려 있는 나무 서랍에 그려진 아래 그림도 좋았다.

 

 

 

뭔가를 꼭 표현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려진 무언가가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래 사진은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작품. 물이 재미있게 표현되었다. 

 

 

 

 

 

 

 

나무판 위에 덧댄 천에 고정된 아래 그림은 하나만 단독으로 전시가 되어있었다. 

그린 듯 그리지 않은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위 사진에서는 잘린 잡초가 페인팅 옆에 있다. 

 

 

 

흰 벽에 설치해서 조명으로 작품에 집중하게 할 수도 있는데, 나무 판과 천, 잡초 등을 같이 놓아 여러 작품을 배치한 것이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 오래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이 할 수 있는 발상이라 생각했다. 

 

 

 

민들레도 좋았다. 

 

 

민들레 작품에는 캔버스 윗면, 옆면에 흙과 비슷한 색의 천이 붙여져 있었다. 

천으로 전부 감싸지 않고 일부 흰 부분을 남겨둔 것도 흥미롭다. 

 

 

아래 그림을 봤을 때는 작가가 기독교인가, 또는 종교를 주제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예수를 그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상 작업을 보니 본인 자화상이었다. 

종교와 별 상관없는 작품.

그러나 식물과 사람, 나무 서랍 등을 이용해 탄생과 삶, 소멸에 대한 주제 의식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는 면에서는 종교와 아주 관련이 없다고도 할 수 없겠다. 

 

 

아래 사진은 위 그림의 얼굴을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게 한 영상 작업. 

(영상 작업물 왼쪽에 놓인 잡초가 가시 면류관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차분한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고 있어 그림들을 보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그림들과 어울리는 곡으로 선곡을 잘 한 듯하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흥미로웠던 미술 전시 

미술 전시에 가면 갤러리와 작가 측에서 제시한 제목과 작품 내용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꽤 있다. 전시를 보기 전에 제목만 봤을 때는 난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전시된 작품들은 <잡초>라는 주제와 내용이 일치하고 었다. 사람과 자연, 삶의 관계를 여러 작품을 통해 일관성 있는 흐름으로 보여주었다. 안톤 무나르의 이번 전시는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분명해 보이고, 작품을 통해 잘 전해받아 통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전시였다. 다음에 한국에서 전시를 하게 되면 어떤 주제로, 어떤 작품들을 선보일지 기대된다.

 

<끝>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