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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전시

차일디쉬하고도 트렌디한 색감의 고요한 풍경 - 빌리 차일디쉬, 리만 머핀 서울 전시

by 티카르트 2024.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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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계정을 용도별로 나눠서 쓰고 있다. 일 계정, 그림 계정, 텃밭 계정과 같은 식이다. 그러나, 어느 계정으로 들어가든 미술 관련 콘텐츠가 뜬다. 하고 있는 일은 여러 가지여도, 마음이 집중하고 있는 한 분야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인스타그램이 추천해준 게시물 중에, 빌리 차일디쉬의 전시에 대한 게시물이 있었다. 딱 요즘 유행하는, 차일디쉬하고도 트렌디한 색감 - 파스텔톤 핑크, 블루, 보라 등 - 을 쓴 그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전시를 하는 리만 머핀 서울은 가기 귀찮다는 핑계를 대기가 무색하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전시 기간이 길면 좀 나중에 가야지, 하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는 경우가 생기는데 빌리 차일디쉬의 전시는 전시 기간도 애매하게 짧게 남아 있었다. 해외 작가의 그림 전시를 본 지도 오래되어, 지체하지 않고 다녀오게 되었다. 

 

영국 작가 빌리 차일디쉬의 전시, <Now Protected, I Step Forth>

 

빌리 차일디쉬는 그림만 그리는 전업 화가가 아니다. 시와 산문, 펑크 록, 사진, 판화, 회화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관심 있는 분야의 범위가 넓으니 각 분야에서의 작품 갯수가 적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도 않다는 것에 적잖게 놀랐다. 리만 머핀 리플릿 소개에 따르면, "지난 40년 동안 170개 이상의 LP 음반을 녹음했으며, 40권 이상의 시집과 다수의 소설을 출판했고, 수많은 회화와 판화를 제작해오고 있다"고 한다. 대단한 창작열이다. 굉장히 활발한 분위기의 화풍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전시 중인 차일디쉬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의 전원 풍경이었다. 

 

리만 머핀 리플릿에서도 한국어로 굳이 번역 되어있지는 않은 제목이 꽤 심오하다고 생각했다. "Now protected, I step forth." 이제 보호받고 있으니,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의 문장. 누구에게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누가 보호해주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그림을 보면서 관객이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찾았으면 좋겠다는 차일디쉬의 바람을 담고 있는 제목인 걸까. 

 

리만 머핀 서울에 전시된 차일디쉬의 작품은 총 9점이다. 그 중 1번으로 전시된 작품은 자화상일 것으로 추정이 되는 그림.

반 고흐의 자화상을 연상시키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분위기, 그려진 스타일도 전혀 다르지만, 그려진 인물의 느낌이 고흐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티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보색을 조화롭게, 부담스럽지 않게 잘 쓴 느낌이었다. 곧지 않은 선으로 그린 사각형의 프레임이 액자 안에 있어, 프레임 안의 프레임 속에 인물이 위치해 있다. 선을 일관된 진한 정도나 굵기로 긋지 않고, 희미하게 긋다가 조금 더 진하게 그은 부분이 그림을 답답하지 않게 느껴지게 하는 요소로 보였다. 검은 선 바깥으로 안쪽의 색이 나와있도록 몇 개 그은 것이 재미있고 센스 있게 느껴졌다. 

 

1. now protected, I step forth 3, 2024. oil and charcoal on linen. 61 * 46cm

 

2번 그림은 아마도 겨울, 설산의 건너편에서 그린 듯한 하이얀 풍경이었다. 뭉크의 둥글둥글한 곡선 터치가 생각났다. 땅을 간결하고 단순하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을 많이 쓴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많은 색을 쓰지도 않았다. 노란색, 흰색, 푸른색, 보라색, 아주 적은 양의 그 중간색들이 쓰인 정도. 유광 바니쉬로 꼼꼼하게 마무리를 한 것 같았는데, 보관에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그게 이 스타일의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2. seen across water, 2024. oil and charcoal on linen. 183 * 213cm

 

3번은 1번 그림보다 조금 더 큰 그림이다. 1, 3번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로 세로 100cm 이상의 아주 큰 그림들이다.

3번 그림의 경우, 잘못하면 식상해보일 수 있는 풍경을 차분한 색, 신선한 색을 같이 써서 표현한 것이 흥미로웠다.

프레임이 되는 선을 긋는 데 쓰인 주홍색, 연한 연두색과 파스텔톤 푸른색이 한 면에 같이 나오면서 그 비율이 크지 않은 것이 

그림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3. 2 trees and moon, 2024. oil and charcoal on linen. 91.3 * 91.5cm

 

그림을 자세히 보면 소량의 파스텔톤 분홍색도 쓰였다. 그리고, 오일 페인팅을 할 때의 장점인 마띠에르도 조금 들어가 있다. 물감 두께 자체는 전혀 두껍지 않아서, 마띠에르마저도 얇다. 그 얇은 마띠에르를 명도를 표현하는 데 쓴 것이 적절해서, 차일디쉬가 굉장히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부러 계산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한 것이라면 더 놀랍고. 

 

 

 

캔버스의 옆쪽에는 압정(?)이 박혀있다. 펑크 록을 하는 사람이라, 록 분위기를 낸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4번은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에서 보았던 그림이다. 뭉크와 피터 도이그, 페르 아돌프센까지 생각나는 그림이었다. 

작가가 9점의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잘 표현된 그림이다. 

그림 왼쪽 하단의 두 그루의 나무를 보고 고흐가 생각나기도 했다. 미술사 공부도 깊게 한 작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 tahoma and 2 trees, 2024. oil and charcoal on linen. 183 * 183 cm

 

린넨 천의 색이 이미 어둡기는 하지만, 밝은 색이든 어두운 색이든 밑색을 깔았으면 어떤 분위기의 그림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그림들은 5번 그림의 일부를 클로즈업해서 찍어본 것들이다. 

 

5. 2 trees, 2024. oil and charcoal on linen. 183 * 183cm

 

단순한 듯 풍부하게 표현된 나무와 하늘, 땅이 재미있어서 요리조리 관찰했다.

하늘을 표현하기 위해 잘 쓰지 않을 듯한 색들을 쓴 것도 재미있지만, 단면도처럼 보이는 땅도 재미있다. 

나무의 뿌리 부분을 뿌리 모양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양한 색으로 표현한 것은 땅과 나무가 교감하며 생성되는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한 게 아닐까.   

 

 

 

아래 사진은 6번 그림의 일부이다. 나무를 내리쬐는 빛을 밝은 색으로 표현한 것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닐까. 나뭇잎들로 빽빽하게 그늘이 지고 어두운 부분을 마띠에르로 표현한 것은 앞서 보았던 그림에서의 표현과 같은 표현 방식이다. 전혀 다른 풍경을 일관된 스타일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차일디쉬가 표현하고자 하는 스타일의 특징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프로 작가들이 일관된 스타일을 뽑아내는 것은 언제나 신기하게 생각되는 부분이다. 

 

 

6. snow trees sun, 2024. oil and charcoal on linen. 122 * 122cm

 

아래 그림은 8번 그림으로, 9점의 그림들 중에서는 다소 식상하고 아마추어처럼 보인다고 느껴진 그림이었다.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오도록 주도하는 하나의 색감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8. western moon set, 2024. oil and charcoal on linen. 183 * 213cm

 

그렇다고는 해도 사이즈가 매우 큰 그림이다. 그릴 때 많은 노력과 시간, 물감이 들어갔을 것 같다.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서도 물감을 더 많이 썼을 것 같은 그림이다. 물론, 물감 두께는 두껍지 않다. 

 

자세히 보니 달도 아무렇게나 그린 달은 아니었다. 

 

 

 

아래 그림은 이 전시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7번 그림이다. 동물인 늑대가 있어서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무들을 이렇게 대담하고 시원시원하게, 그리고 환상적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피터 도이그가 많이 생각나는 그림이었다. 전 그림들도 피터 도이그의 영향을 좀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 그림에선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피터 도이그는 물감을 흐르게 두었지만, 차일디쉬는 흐르게 하지 않으면서도 흐름이 보이도록 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연두색이 많이 들어갔는데 눈이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 사이즈가 커서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이는 것도 있는 것 같다. 

 

7. wolf walking, 2024. oil and charcoal on linen. 183 * 244cm

 

 

 유광 바니쉬로 마무리가 된 것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튜디오 렌카의 경우, 비슷한 색의 린넨 천을 썼지만 유광 바니쉬는 확실히 아니었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어 좋았었다. 어두운 색의 린넨 천에는 유광 바니쉬가 영 어울리지 않는 건가? 왜인지 모르게 유광 바니쉬는 그림의 질이 조금 떨어져 보이게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림을 계속 보다가 늑대를 표현한 방식, 색감도 재미있어서 여러 장 찍었다. 

 

 

 

나무들을 클로즈업한 사진. 

 

 

 

풀이나 꽃을 점, 선, 면에 색을 더해 표현한 것도 재미있었다. 아메바가 생각나는 모양이기도 했다. 

 

 

 

좋은 그림은, 언제나 미술사를 존중하고 포함하고 있다  

 

현대 미술 작품들 중에서도 좋은 그림은, 언제나 미술사를 존중하고 포함하고 있다. 아티스트로서 미술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술의 역사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발전해온 과정에 있었던 좋은 그림들을 따라 그려보면서 터득하는 작업이다. 빌리 차일디쉬는 그런 작업을 충실히 했을 것으로 보이는 작가이다. 40년 넘게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고 하니 나이가 적지 않을 것 같은데, 트렌디한 색감을 적극적으로 쓰는 걸 보면 유행에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인 듯하다. 그림에만 집중하는 작가라면 오히려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기 쉬울 수도 있을 텐데, 차일디쉬는 그림을 보는 관객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색감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가로 생각된다. 앞으로 또 어떤 주제의 그림들을 선보일지 기대가 된다. 

 

8월 17일까지 열리는 빌리 차일디쉬의 전시

 

차일디쉬의 전시는 8월 17일까지이다. 더운 날 가니, 역에서 멀지 않은 갤러리인데도 걸어가는 것이 멀게 느껴졌다. 가급적이면 가장 무더운 시간을 피해서 가기를 권한다. 

 

<끝>

 

 

 

스튜디오 렌카 전시에 대한 이전 게시물: 

https://tikart.tistory.com/entry/%EA%B2%BD%EC%BE%8C%ED%95%9C%EB%8D%B0-%EC%9B%90%EC%8B%9C%EC%A0%81%EC%9D%B4%EA%B3%A0-%ED%9E%99%ED%95%9C-%EA%B0%90%EC%84%B1-%EC%8A%A4%ED%8A%9C%EB%94%94%EC%98%A4-%EB%A0%8C%EC%B9%B4-%EA%B0%9C%EC%9D%B8%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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