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답기만 하면 다 예술인 걸까
예술은 문학, 음악, 미술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통상적인 분류를 떠나,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술로 인정받는 것은 결과물뿐만 아니라, 결과물에 다다르는 작업 과정이 명확히 드러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결과물에 도달하는 작업 과정을 거치는 창작자 본인이 마주하고 극복했던 삶의 굴곡이 드러나고 (창작자가 살아있을 때이든 사후이든), 그 삶의 모양과 결까지도 대중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예술로 인정받는다. 빈센트 반 고흐가 거장인 것은 단지 그가 매우 파랗고 매우 노란 유화 물감을 캔버스 위에 두껍게 두껍게 올려 환상적인 별밤을 표현해 냈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고흐의 작품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던 시절 그의 그림은 충분히 인정 받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뒤에야 그가 그린 작품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 받기 시작했고, 그가 어떻게 그림을 그렸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이 드러나면서 더욱 그 가치가 높아졌다. 작품이 꼭 조형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그 가치를 절대적으로 인정 받는 것도 아니며, 어떻게 보면 미적인 관점에선 영 아닌 거 같은데 싶은데도, 새로운 발상이나 완벽하지 않음이 인정을 받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 미술의 세계인 것이다.
여러 예술 분야 중에서도 미술은, 결과물과 함께 작업 과정이 같이 드러나는 일이 빈번하다. 문학과 음악은 결과물이 먼저 나와 주목을 받고, 그 뒤에 그 작품을 만든 창작자에게 어떻게 만들었나요, 하고 언론에서 대중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질문을 하며 제작 과정의 비하인드 신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은 작업한 음악 파일만 건네주면 된다. 그 안에 모든 정보가 들어있으니까. 문학 역시 퇴고한 원고 한 부면 된다. 그 안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으니까. 기껏해야, 기획 의도나 줄거리 정도를 간략히 서술한 요약문 몇 줄을 추가해서 내는 정도이다.
순수 미술에선 그렇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그림을 여러 점 전시하면, 가장 대표적이고 수작인 작품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전시된 여러 점의 그림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몇 년도에, 어떤 작업 과정을 통해 만들었는지, 무슨 재료를 썼는지 등의 정보를 제공하여 관람객에게 참고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 공모전에서도 어떤 프로세스를 통해 어떤 결과물이 만들어진 것인지, 그 작업 과정까지 고려하여 심사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개인전에서는 어떤 집안 환경, 학력을 가진 작가인지까지 나온다.
물론, 문학과 음악에서도 간단한 이력은 표기한다. 그러나, 미술처럼 구구절절하게 이 사람이 왜 이런 작품 세계를 펼치는지를 작품과 연결해서 글로 길게 쓴 뒤 핸드 아웃까지 만들어 배포하는 일은 드물다. 이쯤 되면 미술 작업 이전에 작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부터를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페레스 프로젝트에서 열렸던 키얀 윌리엄스의 <별빛과 진흙 사이>는 그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숙고가 드러나 있는 듯한 개념 미술 전시였다. 갤러리에 전시된 결과물의 조형적인 완벽함이나 아름다움보다도, 작업 과정을 집중해서 볼 때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전시 말이다.
키얀 윌리엄스의 <별빛과 진흙 사이>
키얀 윌리엄스의 전시는 2층에서 열렸다. 파올로 살바도르의 1층 전시에 이어서 보게 되었는데,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전시장의 흙을 밟아도 된다고 안내를 받아서, 들어가 보니 시커먼 시멘트 비슷한 것이 바닥에 넓게 깔려 있었다.
밟아보니 딱딱했다. 시멘트 같았다. 벽에 걸린 페인팅 작품과 같은 재료가 아닐까 싶었다.
페레스 프로젝트 2층에서 세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전시: 페인팅, 조각, 비디오
2층은 세 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전시가 되고 있었다. 맨 왼쪽에는 페인팅 그림 두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두 번째 섹션에는 조각 작품이 놓여져 있었고, 세 번째 섹션에는 비디오 작품이 상영되고 있었다.
핸드 아웃은 그림 이름과 재료 정보가 그림 옆에 표기되어 있지 않을 때를 위해 들고 다닌다. 그래서, 작가나 작품에 대한 상세 정보 없이 작품을 먼저 봤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작품을 보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섹션에 있는 그림은 이게 그림인가 싶을 정도로 그림 같지 않았다. 뭐랄까, 뭔가 조악한데 조명에 반짝거리는 시커먼 작품이라는 인상이었다. 아름답냐고 물어보면 그렇지는 않았다. 감상 목적으로 벽에 걸기 위해 누가 사는 일은 드물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 의문은 세 번째 섹션의 비디오 영상을 보면서 곧 풀리게 된다). 핸드아웃에 따르면 재료에 질산은이 쓰였다고 되어 있다. Silver Nitrate, AgNO3.
문과였지만 화학을 좋아해서 대학 시험 선택 과목을 화학으로 응시했던 기억이 났다. 미술하려면 깡그리 잊어버렸던 화학 지식을 다시 꺼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부시지 않고 어두운 오렌지빛 조명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우주선에서 지구 바깥 행성의 표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핸드 아웃에 따르면, '불그스름한 조명은 관객을 다른 차원의 세계에 데려다줄 것만 같은 광대한 우주의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되어 있다. 나처럼 그런 느낌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면 의도한 효과를 주는 데 성공한 거겠지?
윌리엄스는 우주선을 나가서 행성의 표면을 밟으면 이런 느낌이라는 걸 바닥에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두 번째 섹션에 설치된 조각 미술 작품은 멋있었다. 작품이 우주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빛과 그림자, 거울의 투영을 잘 활용해 더 깊이 있게 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과학적이다.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연구와 계산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전시 제목으로도 사용하고, 대표 작품으로 내세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작품이 다르게 보여 재미있었다. 아이들도 재미있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아이들은 그냥 그림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어할지도.
하나의 작품으로 여러 측면을 보여주며 다양함을 연출할 수 있는 점이 좋은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에 흥미로움과 깊이를 더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페인팅의 질감과 조각 작품에서 얼굴, 손의 질감이 비슷해보인다. 재료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뭔가 미래적인 느낌이 들면서도 고요한 것이 신선했다.
세 번째 섹션의 비디오 작품이 내게는 가장 임팩트가 있었다. 윌리엄스의 작품이 왜 가치를 가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꽤 긴 비디오인데, 비디오에 등장한 윌리엄스를 보고 작가가 머리가 긴 흑인 남성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영상을 볼 때까지도 핸드 아웃을 보지 않았으므로).
비디오에서는 대화나 나레이션 없이, 흙을 던져 작품을 만드는 소리만이 담겨 있다.
비디오를 보니, 왜 윌리엄스가 흙을 사용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두운 피부, 어두운 색의 흙.
핸드아웃의 해설에는,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흙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흙이 흑인의 역사와 관련해 지역적, 상징적인 맥락에서 갖는 공동체적 의미를 상기시킨다'고 되어있다. 이 설명은 조각 작품인 <별빛과 진흙 사이>에 해당되는 내용이었지만, 이 비디오 작품에도 해당되는 내용일 것이다.
비디오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 사람의 다른 흑인 남성이 등장해, 벽에 선 키얀 윌리엄스를 피해 흙을 던진다.
키얀 윌리엄스는 자세를 바꿔가며 최대한 미동 없이 벽에 붙어 던져지는 흙을 경험한다. 위로 손을 올리고 있다가 아래로 내리면서 곡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붓으로 긋는 것과는 또 다른 형태, 에너지, 질감을 가진 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키얀 윌리엄스 주변으로 캔버스에 흙을 던지던 남성은 키얀 윌리엄스를 업고 작업을 돕는다. 이 장면이 바로, 위에 인용한 해설에서 말하는 '공동체적 의미'를 상기시키는 부분이 아닐까?
왜 저렇게 하지, 저게 뭐지,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말 없이 집중해서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시선을 확 사로잡는 예쁜 그림, 또는 충격적인 그림 또는 음악이 아니었지만, 작업 과정 자체가 관람객에게 전달하는 에너지라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에너지는 시간과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서 전달된다. 그래서 수세기 전의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비디오에서의 과정을 거쳐 첫 번째 섹션에 전시된 두 점의 페인팅 작품이 만들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거나, 혹은 몸의 다른 움직임을 이용해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념 미술은 이렇게 만드는 작업 과정까지 잘 봐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윌리엄스의 전시는 미술 작품들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결과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과정을 볼 때 알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보기에 예쁘냐, 아름다운 전시냐 하면 그렇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 주는 기분 좋음 이상으로, 완벽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어떤 것이 주는 의미와 울림이 있었다.
양보다 질의 중요성을 보여준 키얀 윌리엄스의 전시
1층의 파올로 살바도르와 비교하면 작품은 별로 없는 게 분명한데, 다양한 종류의 작품들이 있어 흥미로웠다.
통상적인 미술 전시를 기대하고 보면 빈약해 보이겠지만, 영상을 보면서 어떤 작업 과정을 거쳐서 페인팅 작품이 만들어지는지를 보니, 비언어적인 정보와 감각이 전달되어 전시가 비어 보이지 않고 꽉 차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그림으로 갤러리를 꽉꽉 채워 내가 작가다, 하고 보여주는 그런 개념이 아닌 것이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비디오는 작업하는 그 시간을 오롯이 담아낸 작품이니, 양과 질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여담이지만, 비디오는 관람 당시에 비디오 재생이 꺼져 있어서 직원 분에게 켜달라고 이야기 했는데, 바로 켜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친절하다는 인상도 같이 남았다.
파올로 살바도르와 연년생인 1991년생 키얀 윌리엄스의 전시. 앞으로 어떤 묵직한 전시로 한국에 또 찾아올지 기대되는 작가이다.
<끝>
1층에서 했던 파올로 살바도르의 전시 후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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