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모르고 갔다가 오후 종일 있다 나온 이시 우드 개인전.
어제 포스팅을 하고도 사진을 다 올리지 못해, 이번 포스팅에 나누어 올린다.
그림 콜렉터와 대중, 두 마리 토끼를 사로잡는 이시 우드
자본주의와 미술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정점에 미술이 위치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고가의 대형 사이즈를 사서 집이든 사업장에 걸어놓을 수 있는, 또는 보관할 곳이나 갤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취미이자,
작품을 살 돈은 없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대중들의 즐거움.
이시 우드의 그림은 미술사에 정통하며 안목이 높은 바이어들의 기준을 만족시키면서, 조금이라도 난해하다 느껴지면 나는 미술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고 평가를 피하는 대중들의 입맛도 만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행에 민감한 20-30대 대중에게는 인스타그래머블한 포토 스팟을 마련해 주고, 중장년층 대중에게는 고전주의, 인상주의 등 다양한 미술 사조를 리얼리즘 회화로 표현해 천박하지 않고 이해하기 쉬우며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시 우드의 작품은 일민미술관 개인전으로 처음 제대로 보게 되었고, 누구의 팬도 아니며 앞으로도 팬이라 자처할 생각도 없다. 이 글은 이시 우드의 개인전을 홍보하는 글이 아님을 명확하게 밝힌다. 그럼에도, 관람객으로서는 그림을 그린 옷으로 미술관을 명품관으로 바꿔버리는 능청스러움에 감탄하게 된다.
상업 예술과 순수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시 우드
그리고, 창작자의 시선에서 상업 예술과 순수 미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시 우드를 칭찬할 수밖에 없다. 예술하면 배곯고 가난에 허덕여야 한다는 건 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미술은 그러려고 하는 게 아니다. 빈센트 반 고흐처럼 살아야만 작가로 거듭나고 거장이 될 수 있는 거였다면, 미술을 하겠다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아지는 일이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이시 우드는 똑똑하게도, 작품에 여러 브랜드와 협업이 가능한 오브제들을 등장시킨다. 시계, 자동차, 구두, 그릇, 장식품 등 종류도 다양하다. 협업만 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미술을 하는 모든 이에게 작품은 생계를 해결할 수단이 되어야 하며, 그 중 누군가에게는 작정하고 돈 벌려고 하는 일이다. 전업 작가를 할 거면 특히나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본다. 이건 글 쓰는 작가와 음악 하는 아티스트, 그 외 분야 예술인에게도 - 미술과 문학, 음악 외 기타 예술을 폄하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디 이해하기 바란다 -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다.
일민미술관을 명품관으로 만들어버리는 대담한 스케일
미술은 명품 브랜드와도 무관하지 않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만들어내는 장인 정신,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 엄격함, 따라서 떨어지지 않고 치솟는 가격.
돈이 많은 사람도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도, 모두가 갖고 싶어 하고 향유하고 싶어 한다. 지난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미술관에서 으레 하는 회화 전시처럼 느껴졌던 1,2층 전시에 비해 3층의 전시는 대놓고 상업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전시였다. 일민미술관 1-3층에 걸쳐 열린 개인전에서 3층에 들어갔다가 여기는 아닌가 하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으니 말이다.
책, 옷과 부츠가 진열된 곳에 트렌디한 팝이 흘러나오는, 명품관 내지는 명품 의류 팝업 스토어 같은 느낌이었다. 작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관람객들에게 어서 와, 하고 손짓하는 느낌이었달까.
글을 쓰면서 그림도 그리는 사람으로서 나중에 전시를 한다면 작품과 연결되는 글이 담긴 책을 이런 식으로 진열해도 괜찮구나, 하고 참고를 할 수 있었던 부분도 있었다. 벽 한쪽 선반에도 책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앉아서 볼 수 있도록 책이 놓여진 의자도 있었다.
작품이 옷으로 프린트되어 판매되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옷을 캔버스 삼아 캔버스 위에서와 똑같은 퀄리티로 유화를 그려 옷걸이에 걸듯 걸어놓은 경우는 처음 보았다. 한 두 벌만 걸려 있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옷뿐만 아니라 부츠에도 그려놓았다. 언젠가 미술 선생님이 했던 말처럼, 일관된 양질의 작품을 많이 만들어내면 설득력이 생긴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림을 그리는 데 쓰인 옷과 가방, 모자 등은 입다가 더 이상 안 입고 안 쓰게 된 것들이었던지,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얻거나 구제 샵에서 싸게 구입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인이 표명을 안 했더라도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채식을 주로 하거나 채식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말고. 이건 순전히 느낌이다. 어디 언급을 해놨는지 찾아볼 법도 한데 절대 찾아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팬이 아님이 드러난다. 뇌피셜 풀가동 중.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아님 말고. ㅋㅋㅋㅋㅋㅋ
나만의 세계에 갇히는 창작 NO, 협업하고 수익 창출하는 창작 YES!
이시 우드의 개인전에서 창작자로서 얻은 배움. 내 스타일 만든답시고 나만의 세계에 갇혀 고립되는 창작 하지 말자. 때때로 자본주의가 더럽다고 느껴지고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아직 붕괴되지 않았다. 무너질지 안 무너질지도 모르고 무너진대도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어쨌든 자본주의와 공존해야 한다. 그리고, 창작을 계속하더라도 돈을 벌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생활 수준을 충족해야 한다. 그러면, 자본주의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온 브랜드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작품 판매 외 부수적 수익 창출을 도모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시 우드가 작품 외 수익을 얼마나 올렸는지는 몰라도, 또는 전시에서만 부내 나지 사실은 협업을 안 하는 외골수일지 몰라도. 나라면 그렇게 하겠다. 사랑해 마지않는 데이비드 호크니도 BMW랑 아트 카 협업을 했었지 않은가? 창작을 해서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참고를 해도 거장의 전략과 걸어온 길을 참고하는 편이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창대해지는 데 유리하다고 본다. 나라고 왜 안 되겠는가? 안된다고 생각하니까 안 되는 것뿐이다.
기분 전환도 되고, 창작 욕구도 샘솟는 이시 우드 개인전
이시 우드의 개인전에 다녀온 이후로 영감을 받아 창작 욕구가 샘솟아 종일 그림도 여러 장 그리고 글도 썼다. 좋아하는 창작에 매진하도록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전시라서 좋았다. 앞으로도 매일 이렇게 살아야지. 창작자로서의 삶을 사랑한다. 어쩐지 마지막이 전시가 아닌 개인의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어 자기중심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다소 자기중심적인 면이 없지 않다면 애초부터 창작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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