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미술 시간에 써본 물감은 수채화 물감 하나였다. 그래서 수채화 물감만 있는 줄 알았다.
미술관에 가서 여러 작품들을 보게 되면서 기름으로 만들어진 유화 물감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크릴 물감이라는 것이 환상적인 색을 낼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은 요시토모 나라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구아슈는 수채화와 아크릴의 중간 정도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그림책에 많이 쓰인다는 것도.
성인이 된 이후 미술 공부를 시작하면서, 구아슈를 제외한 수채화, 유화, 아크릴 세 가지 종류의 물감을 써보게 되었다.
물감마다 성질이 매우 다른데, 문제점이 있다면 그중 냄새가 많이 나면서 독성이 있어 쓰는 동안 머리가 아픈 물감도 있다는 것이었다.
유화 물감이 그런 물감이었다. 인체에 해롭다면 환경에도 좋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독성을 가진 만큼 오래 보존되어, 몇 백 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아 캔버스 속 회화 작품으로 오래 살아남기도 한다.
연습을 하든 작품을 하든 물감은 계속 소모하게 되기 때문에, 비용 절감 측면에서 물감을 만들어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내심 했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작가들이 자신만의 물감을 만들어 쓴다는 이야기를 전시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본 것이 매우 크다.
현대 미술의 살아있는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는 수영장 페인팅을 할 때 아크릴 물감에 세제를 섞어서 물을 표현했다고 했었다.
일본의 모노하 창시자이면서 미니멀리즘과 동양 철학을 화폭에 담아낸 거장 이우환 작가가 물감을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을 본 것도 영향이 있었다. 오래 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다. 물감, 돌가루, 아교 등을 직접 섞어 먹처럼 갈아서 쓰는 장면은 지금 떠올려봐도 인상적이다.*
이왕 만들어 쓰는 거, 인체에도 환경에도 무해하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해 주고, 이를 통해 창작자로서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친환경적인 물감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친환경 천연 물감을 만드는 여러 방법 중 시도해보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숯을 넣어 만드는 물감
소셜 미디어에서 물감을 만드는 여러 영상을 보면서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숯을 이용해 만드는 안료.
숯을 넣어서 물감을 만드는 것에도 여러 방법이 있다.
1) 드로잉할 때 쓰는 자연목탄을 사포에 갈아서 만드는 방법
2) 숯 가루 (charcoal powder)를 넣어서 만드는 방법
3) 진짜 나무 토막을 숯으로 만든 것을 갈아서 만드는 방법
인스타그램에서 언젠가 본 방법인데, 영상 찾기가 쉽지 않아 그냥 기억나는 대로 내용만 올린다.
나무토막을 태워 숯이 된 것을 갈아서, 숯가루를 검 아라빅, 물과 섞어서 만든 물감이었다.
가공된 자연 목탄이나 숯 가루가 아닌, 생 나무토막이라는 천연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제로 웨이스트 물감이라 할 수 있겠다.
숯과 물을 섞어 수채 물감으로 사용할 수도, 린시드 오일 등과 섞어 오일 물감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작품에 검은색을 주로 쓴다면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될 것도 같다.
시간이 돈인데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물감을 사서 쓰는 게 경제적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물이 아닌 과정이 예술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창작자의 의도에 따라 물감을 만들어 쓰는 일은 못할 일도 아니고 의미 없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2. 흙, 돌, 커피 등 자연 재료를 넣어 만드는 물감
우연히 친환경 천연물감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언급한 기사를 소년중앙에서 찾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정독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자연에서 나온 흑토와 황토에서 불순물을 걸러내 안료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커피 박, 천연석 가넷을 넣어 안료를 만들 수도 있다.
서울 서초구에 어몽트리라는 그림공간에서는 친환경 수제 물감을 직접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데,
나도 가보고 싶어졌다.
어몽트리 아트 인스타그램 계정:
https://www.instagram.com/among.trees.art/
계정에 들어가 보면 '친환경미술', '수제 물감', '제로웨이스트 클래스', '비건 드로잉북' 등 호기심을 일으키는 단어들이 많이 보인다.
수제종이 클래스도 있고.
기사에 보면 학생 기자들이 집에서 물감을 만들어 쓰려면 어떤 재료를 넣으면 되냐고 묻는데,
어몽트리 대표인 윤다영 작가는 이에 대해 초코 파우더, 블루베리 파우더 같은 걸 물에 섞어서 써도 된다고 답변한다.
이런 원리라면 요리하거나 천연 염색하는 데 쓰이는 재료들을 넣어 물감을 만들 수도 있겠다.
강황 가루, 치자 가루, 인디고색을 만드는 쪽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비트나 적양배추도 쓸 수 있을까? 물감을 만드는 데 쓰기엔 식재료가 너무 낭비되는 느낌이라 별로 시도하고 싶지는 않지만.
수제 물감을 만들게 되면 만드는 과정이나 테스트 결과를 올려봐야겠다.
* 이우환 작품 위조 관련 기사:
이우환의 미니멀한 작품 특성상 위작이 좀 나오는 편이다. 위작을 가려내는데 물감 성분 대조를 해본 것이 유효했다는 기사가 있다. 물감을 만들어 쓴다면, 그 물감이 지문과 같은 역할을 해 위작을 가려내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607490
** 소년중앙 친환경 천연물감 기사:
"황토로 노란색, 커피박으로 갈색... 친환경 천연물감 그림도 잘 그려져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4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