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시

예술을 넘어 세계를 하나로,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티카르트 2023. 12. 22.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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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청소하면서 틀어두었던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다. 사람은 이성적이지 않다고. 감정을 따라 행동한다고.
시간이 있었던 오늘, 분명히 해야 하는 작업이 있었음에도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백남준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다녀왔다.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 계속 백남준의 영화가 개봉했음을 알려주는 광고를 띄운 것도 충동적인 행동에 기여했다. 아, 자본주의 사회여.  
밤에는 나가지 않기 때문에 바깥이 추운지 어쩐 지를 모르겠다던 지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저녁이었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영문 포스터.

 

예술을 아우르는 백남준의 작품 세계

 
영화를 보기 전까지, 백남준 예술의 시작점이 음악인지 몰랐다. 작곡을 배우러 독일로 떠나면서 예술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서양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클래식을 상징하는 피아노를 부수는 행위, 피아노와 유사한 상징성을 가지는 바이올린에 끈을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행위 등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음악과 미술, 그리고 행위를 모두 작품에 요소를 넣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것은 백남준의 작품 세계이자, 백남준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었다.
 
어떤 소리도 아름답다고 하며, 피아노를 이용해서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로 대중에게 야유받았던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를 보고 큰 영감을 받았던 백남준. 존 케이지의 아이디어를 더 크게 확장시켜, 당시에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던 TV까지 이용해 작품을 만든 것은 대담하고 대단한 시도였다. 그는 영어를 잘하거나, 언변이 뛰어나다거나, 보고 듣기에 편안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도,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예술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고, 예술이 나아갈 방향을 알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나, 무대 같은 것들이 많다는 것도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새로 알게 된 백남준의 작품들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작품이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TV 붓다.
 

백남준의 TV 붓다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한국어판 포스터.

 
백남준의 많고 많은 작품 중에 이 작품을 먼저 봤다면 백남준을 바로 좋아했을 것이다. 여기 저기서 백남준의 작품을 보기는 했지만, 별 감흥은 없었기 때문에 굳이 어떤 작품이 있는지 더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지난달 뮤지엄산에서 봤던 TV 로봇이 그나마 좀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영화를 보니 정말 재미있는 작품은 TV 붓다였다. 박서보의 말대로 심플한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으로, 많이들 사고 싶어 해서 많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TV 붓다>, 백남준. TV를 보고 있는 붓다를 만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또 하나는 <Modulation in Sync>이다. 미국 뉴욕에 위치한 구겐하임 미술관에 있다. 초록색 빛으로 건물 아래쪽에서부터 천장까지 사다리처럼 이어져 있는 모양인데, 영상으로만 봐도 멋진데, 직접 보면 더욱 더 멋있겠다고 생각했다. 백남준이 말년에 작업한 작품이라고 한다.
 

&lt;Modulation in Sync&gt;, 백남준.

 
영화에서 백남준의 제자였다고 자신을 소개한 인터뷰어가,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에 대해서 설명했다. 백남준이 말년에 낸 작품이 야곱의 사다리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 자신에게는, 백남준과 야곱이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인터뷰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사람은 감정을 따라가는 동물임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술을 넘어 세계를 하나로

 
백남준은 TV가 열어준 세상이 정말 새로운 세상일까, 하는 것에 의구심이 많았던 것 같다. 전쟁을 겪고, 목격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버지가 믿고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 반발심을 가졌던 그로서는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TV가 보여주는 세상이, 미디어를 가진 자들이 대중에게 전하는 일방적인 메시지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는 TV로 예술가 동료들과 만든 작품을 TV로 세계 여러 나라에 생중계했다. 신문에 난 것, TV에서 보여지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믿던 시대에 그런 일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과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 대단하다. 
 
같은 시간대에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같은 것을 보면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백남준은 그걸 증명했다. 전쟁이 없는, 세계인들이 서로 자유롭게 소통하는 장을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닐까. 후에 인터넷의 등장에 그는, 내 예상이 맞았구나, 하고 신기해하고 좋아했을까. 
 
 

전세계에 큰 영향을 주는 예술 작품에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한 사회나 국가를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예술 작품에는, 정신이 깃들어있다. 반드시!
 
미술을 공부하면서, 미술사에서 인정하는 작품들은 조형적으로 뛰어나거나,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형적으로 설득력이 있지 않으면 작품에 어떤 장황한 해설이 붙어 있어도 인정받을 수 없다고. 먼저 작품을 만들어놓고 작품 해설은 나중에 갖다 붙이거나, 끼워 맞춘 것들도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경우가 한둘이 아닐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백남준 정도로 전세계에 큰 영향을 주는 일은, 그 작품에 정신이 깃들어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이성과 감정뿐만 아니라 정신 (혼)이 깃들어있는 존재. 전쟁을 종식시키고 세계를 하나로, 평화를 염원하는 정신, 그리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탐구하는 호기심 어린 선구자의 정신, 기존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문을 던지고 파동을 만들어내는 혁명가의 정신이 담겨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백남준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국의 방탄소년단에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BTS가 된 이유와 일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창작자의 입장에서 나는 조형적으로 뛰어나고 아름다운 것에 중요성을 무한정 두지 않는다. 정신이 깃들어있으면 모양이 다소 어그러져 있어도 괜찮다! 백남준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전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던 것이 아닌 것처럼. 방탄소년단이 모든 아이돌 중에 가장 뛰어나고 잘생겨서 전 세계를 출렁이게 한 것이 아닌 것처럼. 예술 작품을 예쁘게 만드는데 온 생을 다 쏟기엔, 예쁨보다는 솔직히 드러냄을 통해 세상에 시급히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와 대중과 함께 꾸준히 실천해야 하는 정신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작품 세계를 이어나가려면 모든 걸 잘할 수는 없어

 
알고 보니 백남준은 음악 공부를 하러 독일로 떠난 이후로, 한국에 34년이나 돌아오지 않고 예술의 여정을 이어나갔던 것이었다. 부모님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에 무아지경으로 빠지면 그럴 수도 있구나, 싶다. 한편으론,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다 해내려 하다 보면 세상을 바꾸는 작품 세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온 시간을 다 써서 집중하고 혼을 오롯이 쏟아부어야 하는 작업을 해봐야만, 나중에 가서 당시에 하려고 했던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어떤 영향을 세상에 주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백남준의 경우, 쏟아부은 것은 시간과 혼뿐만이 아니었다. 한 작품을 하고 나서 모은 돈을 다음 작품에 모두 쏟아붓고, 또 쏟아붓고 하는 식으로 작업을 해서, 계속 가난했고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중풍으로 쓰러진 이후에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활발히 활동을 했다니 정말 대단한 기력이다. 언젠가 휠체어를 타지 않고, 지팡이를 짚지 않고 서서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도 하니 낙관적이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백남준을 좋아하기도 했나 보다.
 
어쨌든, 다른 건 잘 못하더라도, 건강만큼은 시간을 들여 잘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창작자이기 이전에 육체에 깃들어 살고 있는 나를 위해서.
 

달은 가장 오래된 TV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 또 있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 역시 백남준의 작품 중 하나였다는 것.
 

&lt;달은 가장 오래된 TV&gt;, 백남준.

 
이 작품은 제목을 모르고 보면 그냥 달의 변화하는 모습을 TV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구나 하고 시큰둥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제목이 이 작품을 완성해준다. 달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그리고 가장 오래된 TV라는 것. 모두가 밤에 달을 보면서 아 예쁘다, 하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면서 길고 긴 생을 선대의 선대에 이어서 계속 계속 살아왔다. 정확하고 현명하며, 서정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백남준을 좋아한다면, 또는 백남준을 알고 싶다면 이번 영화를 꼭 보면 좋겠다. 
백남준을 닮아 다소 정신 없고, 대부분 흑백이라 지루한 부분도 없잖아 있겠지만, 졸다가 일어나서 보다 보면 그가 말년까지 예술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정신과 그의 에너지에 감탄하게 된다. 
 

이수역 아트나인에서 보았는데 뱃지도 주었다.

 
 

전 예술을 만들지 않아요
예술이 절 만들죠.

백남준

<끝>

뮤지엄산에 있는 백남준의 TV 로봇 관련 포스팅:
뮤지엄산에서 만난 백남준과 제임스 터렐, 그리고 조형 작품들 - https://tikart.tistory.com/m/entry/%EB%AE%A4%EC%A7%80%EC%97%84%EC%82%B0%EC%97%90%EC%84%9C-%EB%A7%8C%EB%82%9C-%EB%B0%B1%EB%82%A8%EC%A4%80%EA%B3%BC-%EC%A0%9C%EC%9E%84%EC%8A%A4-%ED%84%B0%EB%A0%90-%EA%B7%B8%EB%A6%AC%EA%B3%A0-%EC%A1%B0%ED%98%95-%EC%9E%91%ED%92%88%EB%93%A4

뮤지엄산에서 만난 백남준과 제임스 터렐, 그리고 조형 작품들

뮤지엄산은 강원도 원주의 산 속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한솔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플라워 가든, 워터 가든, 본관, 명상관, 스톤 가든, 제임스 터렐관으로 구성되어 자연과 인간의 미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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