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시

입체적인 현대 산수화를 경험하다: 리움미술관 전시, 강서경의 <버들, 북, 꾀꼬리>

티카르트 2023. 12. 1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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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추천을 받고 강서경의 전시에 다녀왔다. 

지인은 명품관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어떤 전시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직접 가서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신선한 느낌을 가지고 관람할 수 있었다. 

 

 

 

보테가 베네타와 파트너를 맺은 전시 

 

왜 명품관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이유는 처음부터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탈리안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와 파트너를 맺은 전시다. 역삼각형을 로고로 쓰는 보테가 베네타의 심플함이 작품에서도 느껴졌다. 

 

파트너를 맺었다는 보테가 베네타가 느껴지는 작품은 요 정도였다. 둥그스름한 곡선과 격자를 이루는 직선이 주로 사용된 다른 작품에 비해, 삼각형이 들어간 편이다.

 

파트너를 맺었다고 해서 명품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 그 브랜드의 제품들의 형태를 가지고 작품화한다거나, 티 나게 브랜드 로고나 이름을 작품 어딘가에 넣거나 하지 않고 <버들, 북, 꾀꼬리>라는 하나의 주제로 일관된 전시를 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강서경이 기존에 어떤 작업을 했었는지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브랜드와 파트너를 맺은 만큼 보테가 베네타와 공유하는 가치를 어느 정도는 작품에 담아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적인 산수화 병풍. 어렸을 때 집에 있었던 오래된 병풍이 생각났다. 이런 병풍이라면 집에 놓고 싶을 것 같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품.

 

 

은으로 만들어진 명품 뱅글이 연상되기도 하는 작품이다.

 

1층: 다양한 감각을 깨워 향유하는 전시 

 

전시는 강서경이 시각, 청각, 촉각 등을 이용해서 만든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금속, 실 등 여러 소재로 만들어진 작품을 관람객 역시 시각과 청각을 깨워 작품들을 향유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고전 회화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감각 기관을 써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 미술 전시도 좋아한다.  

 

2층에서 보이는 1층 전시. 정면에 북이 보인다. 북은 가까이서 보면 글씨가 수놓아져있다.

 

 

그라데이션과 프레임을 활용한 작품. 틀이 묘하게 비틀어진 부분들이 있는 것이 재미있다. 어떤 기준으로 각도를 정했을까?

 

작품을 만질 수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눈으로 보면서 만지면 어떤 느낌이겠구나, 하고 짐작해보았다. 

전시에서 아래 작품이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철제 프레임 가운데 걸려있는 것은 아주 오래된 런드리백이었기 때문이다. 

 

 

런드리백 사면의 메쉬 부분에 각각 다르게 실로 알록달록 자수를 놓았다. 

 

런드리백과 비슷한 파스텔톤의 실로 자수를 놓았다.

 

처음엔 뭔가, 하고 가까이서 가서 보니 런드리백이었다. 더 가까이서 보니 아주 오래된 런드리백인 것을 보고 이런 것도 활용해서 엄청난 작품으로 만들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 

 

각 면마다 다르게 자수를 놓았다.

 

언젠가 집에 있는 런드리백이 작품의 런드리백만큼 낡게 되면 한 번 시도해 볼 법한 아이디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런드리백에 자수를 놓는 창의적인 발상 이외에도 오래된 물건이라고 해서 바로 버리지 않고, 예쁘고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나와 함께 사는 다른 이들의 존재"에 대해 강서경이 했다는 고민과 연결되는 부분이 아닐까. 

 

작품은 천장이나 벽면에도 설치되어 있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귀를 형상화한 것 같은 설치 작품.

 

현대적이지만 참 한국적이기도 한 작품들도 있었다.

아래 작품을 봤을 때는 시골집, 그리고 보랏빛 찰옥수수가 생각났다.

저절로 여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시골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소재, 그렇지만 현대적인 색감으로 만들어진 작품.

 

아래 그림이 있는 곳에서는 차임, 마찰음 등의 소리가 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먹으로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물감이다.

 

현대적인 느낌의 서예 작품 느낌.

 

 

2층: 금속 작품이 주를 이루는 전시

2층은 금속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금속은 차가움 (촉각)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스케일이 클 때는 시선을 확 사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설치된 조명 때문인지, 거의 시각만을 사용해서 작품을 보게 되었다. 작품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선으로 그으면 그냥 곡선에 지나지 않을 것이, 이렇게 멋있는 작품으로 태어난다는 게 신기하다.

 

조명을 활용해 그림자까지 살려 작품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좋았다.

 

빛이 없다면, 집중해서 보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조명을 활용해서 그림자까지 살려 작품을 감상하게 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시각을 주로 사용해서 작품을 보는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빛과 그림자를 살린 입체적인 작품은 경험하게 된다. 

 

위 작품들을 비롯해, 2층에 전시된 금속 작품들은 금속 공예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좋아하고 창작자로서 이렇게 작업하고 전시할 수 있음을 부러워했을 것 같았다. 거대한 실버 악세사리들이 전시되어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브랜드와 파트너를 맺어 가능했던 작업일까 싶기도 했다.

 

작품들은 묵직하면서도 가벼워보이고, 시크한 느낌이 있다.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부분, 표면을 두들겨 점이 찍힌 듯한 부분 등, 한 작품 안에서 표면의 질감이 다양한 경우도 있었다. 핸드메이드의 느낌이 강해서, 인더스트리얼해 보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버 악세사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즐겁고 만족스러운 전시였다. 

 

제한된 색깔과 그라데이션, 비치는 한 겹을 덧씌운 북.

 

입체적인 현대 산수화를 경험하다

 

둥근 곡선으로 산수화의 산을 표현한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많았다. 뾰족한 삼각형으로 했으면 보기에 편안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둥그스름하게 표현이 되어서 그런지, 어떤 소재로 만들어져 있어도 보기에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소재에 상관 없이 통일감도 있어 보였다. 

 

1층의 작품.

 

산을 닮은 듯한 곡선이 여기 저기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산수화 속에서 튀어나온 산 사이를 지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러 색의 긴 금속줄로 표현된 산세.

 

2층 작품.

 

 

차가운 듯 따뜻한 느낌이 드는 흥미로운 전시 

 

금속을 주로 사용하면, 차가운 느낌이 주로 든다. 본 전시는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둥근 유랑이라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금속 이외에도 다양한 소재와 따스한 느낌이 드는 색감을 사용해서 그런 것 같다. 노란색과, 노란색이 섞인 듯한 푸른색, 빛바랜 분홍색, 회색, 녹색 등이 그 예이다. 

 

이 작품은 옆에서 보면 옆면 프레임도 서로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다각도에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금속을 쓸 때 한자의 우물 '정' 자를 모티브로 한 격자의 모양으로 씀으로써 전통적인 한국 문화 특유의 정겨운 느낌을 불러와서 그런 게 아닐까 한다. 

 

매우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데, 자세히 보면 한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격자 무늬가 쓰였다.

 

 

양혜규가 떠오르는 작품들

 

강서경은 양혜규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인 것 같다. 사람을 표현한 듯한 작품들에서는 양혜규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실을 감은 금속은 손으로 만든 실팔찌를 떠올리게 한다.

 

 

전에 포스팅했던 양혜규의 작품들 중에도, 바퀴를 달고 짚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색동저고리를 연상시키는 원색을 쓴 양혜규의 작품은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느낌이 든다. 강서경의 작품들은 실과 나무, 금속을 같이 써서 더 아기자기하고 현대적인 장난감과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했던 양혜규의 작품보다 더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다 다른 모양인데, 귀여운 형태를 하고 있어서 작은 피규어로 만들어진 게 있다면 집에 데리고 와서 매일 말을 걸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하나 내가 만들면 되나?). 

 

아래 작품은 좀 더 양혜규의 작품과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큼직큼직하고 둥그스름한 모양은 좀 더 투박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비슷한 것 같지만 비슷하지 않은 이유는, 양혜규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모양의 원이 쓰였고, 오브제 주변에 치렁치렁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없이 심플하기 때문인 것 같다. 

 

2층 작품.

 

이 작품보다는, 1층에 있는 작품들이 더 매력적이었다. 

 

 

여러 소재로 여러 대상을 표현했는데, 산만하지 않게 보이는 이유

 

여러 소재로 여러 대상을 표현했는데, 산만하지 않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한 가지 이유는, 강서경이 <버들, 북, 꾀꼬리>라는 주제에 맞춰서 형태를 제한적으로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본적인 원, 삼각형, 사각형의 모양에서 크게 벗어나는 특이한 형태가 없었다. 자신이 정한 선, 또는 도형의 형태만으로 다양한 외관의, 일관된 느낌을 가진 연작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본 전시에 쓰인 도형과 선. 로비의 영상 중 한 장면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색감은 파스텔톤의 삼원색을 위주로 쓰면서, 사용되는 소재들의 색감이 서로와 잘 어우러지는 위치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래 작품에서는 노란색 계열의 실이 주로 사용되었다. 노란색 실과 비슷한 색의 금속을 중간에 연결하고, 그 아래에는 다시 노란색의 금속과 그와 비슷한 색의 나무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노란색과 보색 관계에 있는 파스텔톤의 푸른색 다리를 사용해 조화로운 느낌을 준다. 원과 직선을 벗어나는 형태가 이 안에 없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방향감이 있다. 격자 무늬의 직선이 원 바깥으로 삐져나가는 부분이 일부 있고, 둥그런 나무의 위아래로 삐져나온 부분이 있으나 위에서 아래로 향한 방향감을 해치지 않는다. 그림자가 보여 사실적이고, 깊이감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말하는 로봇 내지는 생명력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하는 궁금증마저 인다. 작품에 집중하게 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작업할 때, 작가가 어떤 마음 상태와 기분으로 작업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그림자가 보여서 더 매력적인 작품. 격자 무늬가 원을 다 막지 않고, 오른쪽 아래 부분이 일부 뚫려있어 작품을 답답해 보이지 않게 한다.

 

혼자 봐서 더 좋았던 전시, 강서경의 <버들, 북, 꾀꼬리>

 

전시 공간도 조용하고,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지인과 갈까 생각도 했었는데, 혼자 봐서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본 전시는 12월 31일까지 한다. 아직 가보지 않았다면, 꼭 가보길 추천한다. 전시에 들어가기 전에 가방은 락카에 넣어놓고 들어가게 되어있다.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전, 로비에 있는 작품들과 영상도 꼭 챙겨보도록 하자.

 

로비에서 볼 수 있는 영상 작품.

 

이런 나무 작품도 좋았다. 이런 나무 작품에, 수놓아진 런드리백이 걸려있는 작품도 있다.

 

<끝>

 

양혜규의 전시 <동면한옥> 포스팅:

https://tikart.tistory.com/entry/%EA%B5%AD%EC%A0%9C%EA%B0%A4%EB%9F%AC%EB%A6%AC-%ED%95%9C%EC%98%A5-%EA%B3%B5%EA%B0%84%EC%97%90%EC%84%9C%EC%9D%98-%ED%94%84%EB%A0%88%EC%A0%A0%ED%85%8C%EC%9D%B4%EC%85%98-%EC%96%91%ED%98%9C%EA%B7%9C%EC%9D%98-%EB%8F%99%EB%A9%B4%ED%95%9C%EC%98%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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