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시

인상주의 거장들의 보기 드문 작품들,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Part 4

티카르트 2023. 6. 3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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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2에서 이어짐>

 

해외 갤러리들이 소장한 작품들이 한국에 와서 전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마음 같아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 갤러리 저 갤러리, 미술관 박물관을 다 털어서 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경제적 자유를 외치며 그를 위해 돈벌이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내 마음은 서로 다르지 않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온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전시 마지막에 배치된 인상주의 시대의 작품들이었다. 몇 점 없었지만, 세잔, 고흐,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시대의 거장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모르고 있었던 그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던 시간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폴 세잔의 초기작, <작업실의 난로>

 

미술 공부를 할 때 선생님은 아무리 거장이라도 초기작들은 모작이나 연습작이 많기 때문에 그냥 보고 넘어가도 좋다고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전시에 걸린 <작업실의 난로>는 내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많이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에 정말 획기적으로 평면적인 그림들을 내놓으며 그만의 스타일을 완성한 세잔에게도 습작의 시절이라는 것이 있었구나, 하고 보니 그 나름대로 좋은 것이 있었다. 위로가 된달까? 동시에, 역시 거장은 거장이라 정물화부터도 이미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 설명대로, 사물의 구도도 아주 안정적이고 그림에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작업실의 난로, 폴 세잔 그림.

 

까만 벽에 대충 그린 듯한 얼룩 비슷한 것들을 보자. 액자를 그린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정확하고 정밀하게 묘사를 하는 대신 그가 벽에 걸린 무언가, 또는 얼룩을 보면서 받은 인상을 그대로 옮겨온 모습이 너무 시원스럽고 좋지 않은가? 그리고 그림대로 정말 벽이든 바닥이든 저렇게 까맣기만 했을까? 보이는 그대로 색깔을 캔버스 위에 옮겼다면 저런 그림은 절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우면서 단순하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이 느낌이 바로 세잔 고유의 스타일이 아닐까.

 

나만의 생각일 수 있으니 그렇게 느끼라고 강요야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세잔의 그림들을 모작할 때는 시원시원하고 순간에 더 집중하게 되는 재미가 있어서, 그의 그림들을 참 좋아한다. 그림을 그린다고 꼭 다 설명을 하듯이 정확하고 오밀조밀하게 표현을 해야 하는가? 내가 그려서 좋으면 되는 거지.

 

몇 년 전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일러스트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볼 당시에만 해도 실수 없이 잘 그려야 한다거나, 귀엽고 예쁘게 그려야 한다는 어떤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작년에 만난 미술 선생님도 잘 그리고 못 그리고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좋은 대로 그리는 것이 좋다고 얘기를 해주셔서 미술 작업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서빙의 여왕을 그린 마네 

 

마네의 <카페 콩세르의 한구석>이라는 그림은 나름 그려진 데 스토리가 있는 작품이었다. 잔을 여러 개 들고도 술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서빙을 하던 종업원들의 솜씨에 감탄해, 그 중 가장 서빙을 잘하는 종업원에게 모델이 되어줄 수 있냐고 물어본 뒤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모델이 되어준 종업원은 자신의 '보호자'도 같이 가서 돈을 받게 해 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고.

 

카페 콩세르의 한구석, 에두아르 마네 그림.

 

종업원 앞에 앉은 파란 셔츠의 남성이 바로 그 보호자라고 한다. 종업원과 그의 보호자 모두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린 마네가 재치있게 느껴졌다. 주인공답게, 종업원의 얼굴은 밝게 표현되었으면서도 인상이 강하다. 종업원의 보호자라는 남성은 등 아래쪽이 밝게 그려진 게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궁금해졌다. 종업원 뒤편의 발레리나는 마네가 종종 그리기 좋아하던 대상을 옮겨온 것 같고. 일러스트로 따지면 익숙하게 그릴 줄 알고, 또 그리기 좋아하는 것을 그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림에서 모델의 보호자의 등. 일부만 굉장히 밝은 것이 인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네의 <붓꽃>

 

1914-17년경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모네가 백내장을 앓는 동안 그려졌다. 시력이 온전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좋아하는 붓꽃을 그리는 모네의 마음속엔 어떤 생각과 감정들이 있었을까? 정확히 묘사하지 않고도 그림에서 표현한 사물을 내가 보고 느끼도록 한다는 점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점 몇 개 찍었는데 그게 꽃인지 알겠고 (물론 작품 제목을 보기도 했지만), 또 꽃 주변으로 드리워진 풀이 제각각 느낌도 다른 것이 재미있다. 어떤 풀은 빛나고, 어떤 풀은 그늘에 있는 것 같고.

 

붓꽃, 모네 그림. 그림 사이즈가 엄청나다.

 

서로 다른 색깔로 빛과 어둠을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주의 때부터 나타난 것 같고,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의 스타일을 만드는데 큰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그림 오른쪽 아래에서는 뭔지 모르겠지만 요동치는 것 같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작업하기 전에는 그림을 보면 그냥 전체적으로 보고 휙 넘겼었는데, 작업하면서부터는 그림을 여기저기 자세히 관찰하고 부분을 찍어서 보기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창작자로서의 시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인가?!) 

 

 

세잔을 사랑한 폴 고갱의 정물화 

 

후기 인상주의에 속하는 고갱의 작품. 전시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은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갱이 세잔의 정물화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누군가를 많이 좋아하면 그대로 따라 하고, 똑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법. 과일과 칼, 테이블보 등 세잔이 정물화에서 주로 등장시킨 정물들이 등장한다. 고갱은 세잔을 그렇게 사랑했나 보다. 한 사물에 초점을 맞추어 사진 찍듯 그리지 않고, 모든 사물을 선명하게 그렸다. 

그림 속 컵은 맥주잔이라는데, 어쩐지 카스 맥주 캔처럼 보였다.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 폴 고갱 그림.

 

 

신화나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평범한 여성의 누드를 그린 르누아르 

 

과거 서양에서는 누군가 지켜보는 줄 모르고 있는 전라의 여성을 그림에 담는 것이 흔했지만, 르누아르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여성의 누드를 그림에 담았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붓 터치를 짧게 하면서 보색을 이용해 그림 속 대상의 빛과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그림의 특징이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병치 혼합'이라고 알려주신 개념이 르누아르의 그림에 나와있는 것 같다고 혼자 생각했다. 

 

목욕하는 여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림.

 

 

르누아르의 그림은 엄청 부드럽고 아름답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밝은 편이기도 하고. 그림의 모든 부분이 밝다는 뜻은 아니다. 

 

나비가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 

 

고흐 그림 중에 이렇게 차분한(?) 그림도 있는 줄 몰랐다. 물론, 다른 인상주의 작품과 비교하면 역시 차분함보다는 다분히 입체적이고 살아있는 느낌이다. 조그맣게 그려진 나비들은 진짜 가까이서 봐야 잘 보인다. 사진으로 그림을 찍어두니 얼마나 입체적인지가 새삼 더 보인다. 물감을 정말 얼마나 많이 썼을지! 고흐처럼 그리는 걸 *임파스토 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전시 설명을 보고 배웠다.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임파스토 기법이란?

 

임파스토 기법은 회화 작품에서 물감이나 페인트, 재료를 두껍게 쌓아 입체감과 질감을 부현하는 기법이다. 그림의 표면이 돌출되어 입체적으로 보이게 된다. 주로 오일 페인팅에서 사용되고, 페인트 브러시, 팔레트 나이프, 스펀지 등 다양한 도구로 표현할 수 있다. 또, 색채를 표현하는 동안 그림 표면을 두드러지게 해서 색채의 조화와 브러시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브러시를 빠르게 또는 강하게 움직이며 그림에 감정이나 활기 등 다이내믹한 효과를 주는 것이다. 그림에 생동감을 주고, 더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임파스토 기법으로 두껍고 입체적으로 그려진 것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 나비가 아주 조그맣다.

 

고흐가 세상을 보는 눈과 표현력이 독특한데,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해 억울하고 슬프고, 외로웠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주역 관련 책에도 고흐가 언급되었던 기억이 난다. 누구나 잠룡, 즉 하늘에 아직 오르지 않고 물 속에 숨어있는 용의 시기를 거치게 되는데 고흐처럼 평생을 잠룡으로 보내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결국 먼 후대에 와서 크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지만, 살아가는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한 실패자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비운의 삶을 살았으니 당시 그의 삶이 안타깝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잠룡의 시기를 오래 보내게 되어도 어쩔 수는 없고, 그렇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매일 열심히 즐겁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트레이닝 중인 그림도 언제 빛을 보게 될지 모르고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하면서 즐거운 일이면 결과에 상관없이 과정을 즐길 수 있다. 배움과 배울 수 있는 몸과 마음의 건강, 그리고 생계의 지속을 위해서 물질과 비물질이 계속 풍요롭게 들고 나도록 깊이 기도한다.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관람을 마치며 

 

오전 10시에 입장해서 11시 반 정도까지 보았다. 사람도 많고, 그림도 많아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림이 많지는 않았고 금방 다 보았다. 밖으로 나오니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엄청 길게 있었다. 짐 보관함에 짐을 보관하려고 그 앞 의자에서 보관함이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고. 보관함이 무료라서 좋았다. 여유 있게 편하게 보고 싶으면 역시 평일 오전에 오픈런이 최고다. 평일이고, 오전이어도 그림을 사랑해서 보러 온 사람들이 참 많았다. 

 

입장시 볼 수 있는 벽. 오전에 아직 사람이 많지 않을 때 찍었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그림이 적어서 실망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막 작업을 시작한 그림 새내기로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초기작이든 유명작이든 재미있게 감상했다. 보고 싶었던 작품들이 별로 안 와서 실망스러웠다면 입장료로 낸 돈이 아까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국에 가지 않고도 내셔널갤러리에 있던 거장들의 그림들을 얼리버드로 볼 수 있어서 (10,000원) 내겐 만족스러운 가격이었고, 즐겁고 감사한 배움의 기회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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