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서적

마틴 게이퍼드가 들려주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이야기 - 내가, 그림이 되다

티카르트 2024. 10. 1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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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게이퍼드가 들려주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이야기, <내가, 그림이 되다>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내가, 그림이 되다> - 마틴 게이퍼드. 디자인하우스 출판

 

 

<내가, 그림이 되다>는 마틴 게이퍼드가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모델로 서면서 쓰인 책이다. 게이퍼드의 초상화 모델 경험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독특한 초상 화가로 유명한 루시안 프로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저자인 게이퍼드의 눈을 통해 보이는 프로이드는 작품을 통해 만나는 프로이드보다 더 다채로운 면모를 지녔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프로이드의 성격이나 생각, 그가 했던 경험도 흥미로웠지만 창작자로서 참고하면 좋을 만한 내용도 많아, 책을 읽을 때마다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아직 읽는 중이지만, 책 초반에서 인상 깊게 본 부분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먼저 글을 쓴다. 

 

사람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진 화가, 루시안 프로이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손자이기도 한 루시안 프로이드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았던 모양이다. 아래 사진의 책 내용에서와 같이, '대화를 독점하는 사람이 아니라 좌담가'라는 것이 납득이 가면서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프로이드의 작품 속 인물을 보고 있자면, 독특하고 능숙하면서도 어딘가 기괴하고 불편한 느낌에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계속 시선을 빼앗기다 결국엔 인물의 형상이 뇌리에 남아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자기 잘난 맛 - 잘 그리는 능력 - 에 자아도취되어 사는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정말 상대방에 대해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인다'니 놀라울 수밖에.

 

프란시스 베이컨의 초상화, 루시안 프로이드. 사진 출처: wikiart.org

 

하지만, 인물을 그리는 사람이니 어떻게 보면 사람에 대한 관심이 당연히 클 수밖에 없기도 하겠다. 

 

루시안 프로이드로 구글 검색을 하면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 작품들이 뜬다. 처음에 봤을 땐 굉장히 음울하고 빡센 얼굴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출처: google.com

 

 

프로이드가 생각하는 그림의 '운율'

 

프로이드가 생각하는 그림의 운율이란, '서로 맞물리거나 공명하는 형태의 우아한 흐름'이라는 표현을 보고 '대체 어떤 그림이라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왠지 모든 형태가 서로 순조롭고 깔끔하게 꼭 맞아떨어지면 그 그림은 결코 주목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프로이드의 말을 읽자마자, 그의 작품들이 하나 둘 떠오르며 그가 그림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나도 잘 그리기만 한 그림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중요한 건, 계속 시도할 수 있는 용기

 

프로이드가 생각할 때 화가가 극복해야 하는 난제는, 계속 똑같이만 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시도하는 것이다. '안정적이거나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 계속 잘 그리고 싶고, 실수를 하고 싶지 않은 화가에겐 지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도 그런 마음이 있는데, 이 부분을 보면서 공감하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다. 매번 다르게 그린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그리고 프로이드는 어떻게 매번 다르게 그릴 수 있었을까. 

 

 

 

계속 다르게 그려봐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자신의 작품이 '특정한 특징을 띠기 원치 않는 사실'과도 이어지며 일관성을 가진다.  이 일관적인 흐름은 좋지 않은 예술 작품을 창작한다는 생각에 질색할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창작할 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얼마나 집중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경각심을 조금 더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드는 자기 자신도 많이 그렸다. 사진 출처: google.com

 

 

루시안 프로이드가 그린 루시안 프로이드. 사진 출처: wikiart.org

 

 

프로이드가 매시간, 매일 더 잘하는 방향으로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 

 

프로이드가 계속 성장하는 그림을 꾸준히 그릴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해서 만족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그린 그림이 다른 화가들이 그린 그림보다 월등하다고 믿고자 하는, 어찌 보면 오만하게도 보이는 마음이다. 동시에 품기 어려워 보이는 '엄격한 자기비판과 과대망상증적인 야망의 조합'은, 모든 예술인이 계속해서 작품을 통해 진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그리고 가져야만 하는 태도인 것 같다. 

 

 

 

프로이드라는 성을 듣기만 해도 '아, 프로이드!'하고 떠올리게 되는 것이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이다.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드가 그에 대해 언급했던 순간을 게이퍼드가 기억해 책에 기록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심각해하거나 무거워지지 않는다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이퍼드를 통해 드러나는 화가, 사람으로서의 루시안 프로이드의 여러 면모를 보면 루시안 프로이드 역시 그의 할아버지처럼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로이드의 그림은 보면 '아, 프로이드구나'하고 알게 되는 색채를 가지고 있다. 게이퍼드의 책에서도 프로이드가 역시나 특정한 범주의 색채를 쓰고 있다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 연갈색, 회색, 흰색, 베이지색, 옅은 노란색, 크림색, 갈색, 검은색. 이 모든 색이 어우러져 상당히 무게감 있는 분위기가 캔버스 위에 만들어지는 거구나 싶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무겁고 어두운 색채인데, 프로이드는 이를 '생명의 색채'라고 불렀다는 것이 신기하다. 사람의 눈과 취향이 이렇게도 천차만별로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각 화가가 어떤 색채를 선호하는지는 '기질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프로이드의 말이 정확하다. 각자 끌리는 색, 필요로 하는 색, 썼을 때 입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색, 우울해지는 색이 다 다르니 말이다. '사물을 조합하는 것은 사람의 취향'이라는 말 역시 맞다.  

 

 

 

프로이드의 작품 주제가 주로 인물이다 보니, 게이퍼드도 책에서 얼굴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 몇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나 역시 얼굴을 그리는 것을 재미있어하고 있는데, 얼굴에 대한 내용을 읽다 보니 왜 얼굴을 그리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수학적으로 사람의 이목구비에서 가능한 변형의 가짓수는 100의 200 제곱'이라니! 이러니 얼굴을 그려도 그려도 질리지가 않는 것이다. 이 수가 '인간의 어떠한 무한대 개념도 훌쩍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총량'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얼마나 많은 경우의 가짓수인 것인가? 

 

 

 

나의 미술 선생님은 얼굴을 그리면 은근히 잘 팔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린 대상이 누군지 알고 사가겠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보았을 때 초상화는 늘 존재해왔다. 미술관, 박물관에서 빼놓지 않고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그래서, 얼굴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계속해볼 생각이다. 

 

물감에 대한 데미안 허스트의 견해도 흥미롭다. '캔버스 표면 위의 물감 층은 방 안에 있는 사물과 똑같다,' '물감 층은 층층이 쌓인 물리적인 사물'이라는 것 등등. 물감에 대해 오랜 시간 깊게 생각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허스트는 프로이드 작품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의견을 남겼다. '프로이드 작품에서 내가 좋아하는 점은 재현과 추상의 상호작용'이라고 말이다. 멀리서 보면 사진 같은데, '가까이 다가서면 불안정한 흔적만 있기 때문'이라고. 어떤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추상적인 특성이 보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고도 멋진 일이다. 

 

나의 미술 선생님은 시력이 좋지 않은 게 그림 그릴 때는 더 유리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던 당시에는 정말 그럴까, 하고 의아해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프로이드도 그림을 그릴 때는 돋보기를 쓰지 않겠다고 오래전부터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신기했다.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시력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니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화가 진행되면 시력은 약해질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시력이 좋지 않으면 오히려 더 잘 그릴 수도 있어서 늦게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화가들이 많기도 한 걸까? 

 

예술 작품으로서의 그림은 보이는 그대로 옮겨 그리기만 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작품의 질과 시력이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 타당하기도 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초상화에서 그려지는 대상인 모델이 우선이 아니라, '그림을 돕기 위해' 모델이 있는 것이라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주장. 그가 그림에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는 대상, 즉 모델은 언제나 바뀔 수 있지만 그린다는 행위 자체는 바뀌지 않고 계속되는 일이다. 그릴 때마다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 그리는 사람의 의도라면, 당연히 그림을 우선에 둘 수밖에 없게 된다. 

 

프로이드가 왜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는 그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래 사진의 페이지). 

 

 

 

사람들을 닮은 초상화가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초상화.
모델과 닮은 것이 아니라 그림이 되기를.
배우처럼 그들을 묘사하기를 원합니다.

 

 

'내게 물감은 사람'이라는 말이 참 충격적으로 신선하다. 프로이드는 물감이 곧 살아있는 사람이고, 살아 숨 쉬는 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인상적인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나 보다. 

 

 

프로이드는 시간에 대한 감각도 예리한 사람이었다. 경험상 하고 있는 일에 따라 몇 초, 몇 분, 또는 몇 시간 등 어떤 시간의 길이에 더 예민해지는지가 달라지는 것 같다. 대중음악을 한다면 2-3분에서 길게는 5분 정도에 대한 시간 감각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시간 감각이 좋다는 건, 프로이드처럼 시계를 보지 않고도 몇 분쯤 지났는지를 거의 정확히 맞출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이탈리안 요리를 할 때의 시간 감각과, 발효빵을 구울 때의 시간 감각 역시 서로 다를 것이다. 나는 요즘엔 10-15분, 30분 정도의 시간 감각이 괜찮은 편이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또 읽게 되면 다른 포스팅으로 정리할 예정이다.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내가, 그림이 되다> 도서 링크: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073320

 

내가 그림이 되다 | 마틴 게이퍼드 - 교보문고

내가 그림이 되다 | 루시안 프로이드의 다양한 작품과 데이비드 도슨의 사진을 만나다!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내가 그림이 되다』. 이 책은 구상화가 루시안 프로이드가 미술평론가인 마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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